이타카와 알렉산드리아
카바피의 두 시 - 여행하는 법, 작별하는 법
1911년,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한 그리스계 시인이 두 편의 시를 발표했다.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그는 평생 관청의 사무원으로 일했고, 생전에 시집 한 권을 정식으로 내지 않았다. 시가 완성되면 몇 장씩 인쇄해 가까운 이들에게 나눠 주었을 뿐이다.
그 해의 두 편은 서로 반대편을 바라본다. 하나는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에게 말을 건다. 따로 읽어도 좋은 시이지만, 나란히 놓으면 한 사람의 생애를 앞과 뒤에서 비추는 한 쌍이 된다.
이타카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섬 이타카로 돌아가기까지 10년을 바다에서 떠돈다. 사람을 잡아먹는 거인족 라이스트뤼곤, 외눈박이 거인 키클롭스, 그리고 아들의 눈을 잃고 분노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그 길을 막는다. 카바피는 이 오래된 귀향 이야기를 가져와, 전혀 다른 말을 한다.
이타카로 길을 떠날 때에는,
그 길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라,
모험으로 가득하고, 배움으로 가득하기를.
라이스트뤼곤족과 키클롭스도,
성난 포세이돈도 두려워하지 마라.
그런 것들은 네 길에서 결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네 생각이 높은 곳에 머물고, 고귀한 감동이 네 정신과 몸을 건드리는 한.
라이스트뤼곤족과 키클롭스도,
사나운 포세이돈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들을 네 영혼 속에 데리고 다니지 않는 한,
네 영혼이 그들을 네 앞에 세워 놓지 않는 한.
그 길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라.
수많은 여름날의 아침들이 있기를,
얼마나 큰 즐거움과 기쁨으로
처음 보는 항구들에 들어서게 될지를.
페니키아의 교역소들에 들러,
아름다운 물건들을 얻어라,
자개와 산호, 호박과 흑단,
온갖 종류의 감미로운 향료를,
가능한 한 풍성하게 향료를 얻어라.
수많은 이집트의 도시들을 찾아가,
배우고 또 배우라, 지혜로운 이들에게서.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어라.
그곳에 닿는 것이 네 목적지다.
그러나 여행을 조금도 서두르지 마라.
여러 해 동안 이어지는 편이 더 좋다.
늙어서야 그 섬에 닿기를,
길에서 얻은 모든 것으로 풍요로워진 채,
이타카가 너를 부자로 만들어 주리라 기대하지 않으면서.
이타카는 네게 아름다운 여행을 주었다.
이타카가 없었다면 너는 길을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이타카가 네게 더 줄 것은 없다.
비록 그곳이 초라하다 해도 이타카는 너를 속이지 않았다.
그토록 지혜로워지고, 그토록 많은 경험을 했으니,
너는 이미 이타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처음 읽으면 이상한 권고다.
목적지가 있는 사람에게 그 길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라고 한다. 오디세우스는 한시라도 빨리 집에 닿고 싶어 했는데.
끝까지 따라가 보면 이것은 목적지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카바피는 언제나 이타카를 마음에 두라고 분명히 말한다. 목적지는 방향을 준다. 다만 속도까지 정하게 두지 말라는 것이다. 목표가 방향이 아니라 재촉이 되는 순간, 여름날의 아침과 처음 보는 항구와 배움은 모두 서둘러 통과해야 할 구간으로 줄어든다.
괴물에 관한 구절도 오래 남는다. 라이스트뤼곤족도 키클롭스도 만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그들을 네 영혼 속에 데리고 다니지 않는 한. 폭풍이 오지 않는다는 약속이 아니다. 같은 폭풍이라도 그것을 재앙으로 만드는 틀의 상당 부분이 우리 안에 있다는 관찰이다. 아직 오지 않은 실패를 미리 눈앞에 세워 두는 일, 지나간 상처를 거듭 불러오는 일. 사람은 바다보다 그쪽에서 더 자주 난파한다.
그리고 마지막 연. 긴 여행 끝에 닿은 섬이 초라할 수 있다고 시인은 미리 말해 둔다. 그래도 이타카는 너를 속이지 않았다고. 이타카가 줄 수 있었던 것은 처음부터 보상이 아니라 길을 떠날 이유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행에서 이타카는 복수가 된다. 이타카들. 한 사람의 생애에는 시기마다 다른 이타카가 있다. 오래 걸어 본 사람은 그것들이 모두 도착할 곳이기보다 출발할 이유였음을 안다.
알렉산드리아
기원전 30년 여름,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는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악티움 해전에서 패한 뒤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알렉산드리아로 물러났고, 적의 군대는 이미 도시 앞에 와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결전을 앞둔 한밤중 어디선가 악기 소리와 환호가 들려왔다. 보이지 않는 행렬이 지나가듯 도시를 가로지른 그 소리는 적진 쪽 성문 밖으로 사라졌다. 사람들은 안토니우스가 평생 닮고자 했던 신이 그를 떠나는 소리라고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카바피는 이 장면을 가져오면서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본문에서 지웠다. 이름은 제목에만 남고, 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너’에게 말한다.
어느날 문득 한밤중에,
보이지 않는 행렬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황홀한 음악과 목소리가 들려오거든-
이제 너를 저버리는 운명을, 실패한 일들을,
삶의 계획들이
모두 착가으로 드러났다고 해서 헛되이 슬퍼하지 마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처럼, 용기 있는 사람처럼,
떠나가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작별을 고하라.
무엇보다 자신을 속이지 마라. 그것이
꿈이었다고, 네 귀가 잘못 들었다고 말하지 마라.
그런 헛된 희망으로 자신을 낮추지 마라.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사람처럼, 용기 있는 사람처럼,
그런 도시를 누릴 자격이 있었던 너에게 어울리게,
굳건히 창가로 다가가라.
그리고 깊은 감동으로 귀를 기울여라. 그러나
검쟁이의 애원과 탄식으로 듣지는 마라.
마지막 기쁨으로 그 소리들을 들어라,
보이지 않는 신비한 행렬의 황홀한 음악을,
그리고 작별을 고하라, 네가 잃어가는 알렉산드리아에게.
이 시에는 위로가 없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끝난 것을 끝났다고 보라고 할 뿐이다.
가장 엄격한 대목은 한가운데의 세 줄이다. 그것이 꿈이었다고, 네 귀가 잘못 들었다고 말하지 마라. 그런 헛된 희망으로 자신을 낮추지 마라. 여기서 카바피가 문제 삼는 것은 희망 자체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하기 위해 지어내는 희망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굴욕이 아니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굴욕이라는 시각이다.
그렇다고 차갑게 견디라는 말도 아니다. 시인은 깊은 감동으로 귀를 기울이라고 한다. 금하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겁쟁이의 애원과 탄식이다. 품위는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감정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에 가깝다.
그리고 역설이 하나 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행렬의 음악을 마지막 기쁨으로 들으라고 한다. 잃을 수 있다는 것은 한때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 도시를 누릴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것을 잃는 방식도 그 크기에 어울려야 한다.
두 대목을 나란히 놓으면 작은 변화 하나가 눈에 띈다. 첫 연의 끝에서 작별의 대상은 떠나가는 알렉산드리아다. 마지막 행에서 그것은 네가 잃어가는 알렉산드리아가 된다. 처음에 도시는 스스로 떠나가는 것이었는데, 시가 끝날 때 그것은 내가 잃는 것이 된다. 상실이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건에서, 내가 인정하고 감당하는 나의 일로 옮겨 온다. 이 시가 요구한 모든 것이 이 한 줄의 변화에 담겨 있다.
창가
두 시는 같은 해에 쓰였지만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이타카」는 길 위의 긴 세월을, 「신께서 안토니우스를 버리시니」는 한밤중의 한순간을 말한다. 하나는 서두르지 말라고 하고, 하나는 붙잡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두 시에는 같은 말이 하나 숨어 있다. 「이타카」는 이타카가 너를 속이지 않았다고 하고, 「안토니우스」는 무엇보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한다. 우리말에서도 둘은 같은 ‘속이다’이고,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같은 동사다. 한 시는 목표에게 속았다는 원망을 거두게 하고, 다른 시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자기기만을 거두게 한다. 여행의 끝에서도, 작별의 순간에도, 카바피가 경계한 것은 결국 속임이었다.
살면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을지는 대부분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길 위의 것들을 누리는 방식과, 떠나는 것들과 작별하는 방식은 여전히 고를 수 있다.
이타카를 향해 가는 동안에는 그 길이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고, 알렉산드리아가 떠나는 소리가 들리는 밤에는 굳건히 창가로 다가가는 것. 두 편의 시가 한 사람에게 건네는 것은 그 두 가지 태도다.
두 시는 공공영역에 속한 그리스어 원문에서 우리말로 옮겼다.